기업용 소프트웨어는 오랫동안 사무직 업무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AI가 업무 일부를 직접 수행하면서 제조 현장도 소프트웨어 기업의 큰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Seat당 과금은 공장에서 통하지 않는다
제조업용 SaaS는 예산 때문에 작은 시장에 머물렀다. 2021년 기준 제조기업의 IT 지출은 매출의 1.4~3.2%로 금융서비스(4.4~11.4%)보다 훨씬 적다. 금융업의 하위 25% 기업도 제조업 상위 25%보다 IT에 더 많이 쓴다.
하지만 AI가 검사, 견적, 보고서 작성 같은 업무 자체를 맡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교 대상이 IT 예산이 아니라 매출의 15~30%에 이르는 인건비다. IT보다 몇 배 큰 예산이 열린다.
과금 기준도 좌석 수에서 처리 성과로 바뀐다. 공장과 건설 현장에는 작업자 수만큼 계정이 필요하지 않다. 대신 검사 건수나 완성한 서류에 값을 매길 수 있다. 실제로 좌석 과금은 줄고 사용량과 성과를 섞은 방식은 늘고 있다.
전제는 신뢰성이다. 사람이 결과를 매번 확인해야 한다면 고객은 성과에 돈을 내지 않는다. 오류를 과금에서 뺄지, 재작업 비용은 누가 낼지도 계약에서 정한다.
여기에 인력난까지 겹치면서 변화 속도는 더 빨라진다. 미국 제조업의 2026년 1분기 평균 구인율은 4.1%였고, 4월 생산, 비관리직의 시간당 임금은 30.10달러였다. 빈자리와 임금 부담이 함께 커지면서 AI는 보조 도구보다 인력 공백을 메우는 수단에 가까워졌다. 구매 기준은 기능 수가 아니다. 불량률과 밀린 작업량이다.
산업 현장으로 이동하는 투자금
투자금도 산업 현장으로 이동한다. 2025년 미국, 캐나다에서 100만 달러 이상 조달한 소프트웨어, AI 투자 중 버티컬 기업은 전체 거래의 53%를 차지했다. 버티컬 기업은 특정 산업의 업무와 고객만을 위한 소프트웨어 기업을 뜻한다. 투자액 비중은 30%였지만 10억 달러 이상 거래 12건을 빼면 51%다. 범용 모델과 인프라의 초대형 투자가 전체 수치를 키운 결과다.
초기 시장에서는 흐름이 더 뚜렷하다. 100만~500만 달러 라운드의 버티컬 기업 비중은 2025년 1분기 53%에서 4분기 60%로 늘었다. 산업별 문제를 푸는 신생 기업은 많아졌지만, 큰돈은 어디에 몰리는가. 여전히 모델과 컴퓨팅 인프라다.

제조, 산업 분야는 110건의 거래로 86억 달러를 유치했다. 직원 1명당 투자액도 42만1천 달러로 교육 분야의 두 배가 넘었다. 설비와 현장 배치가 필요한 만큼 순수 소프트웨어보다 많은 자본이 든다.
Prometheus(출범 당시 이름 Project Prometheus)가 극단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2025년 62억 달러로 출범한 뒤 2026년 120억 달러를 추가 조달해 물리 제품의 설계와 제조에 뛰어들었다. 한 회사의 조달액이 제조, 산업 분야 전체 투자액의 상당 부분에 해당한다. 다만 이를 산업 전체의 성숙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법률과 건설처럼 문서와 현장 기록이 이미 쌓이는 분야는 도입이 더 빠르다. 법률 AI 기업 Harvey의 연간 반복 매출(ARR)은 Sacra 추정치로 2026년 5월 3억 달러에 이르렀고, 건설 현장 기록 서비스 CompanyCam은 4억1,500만 달러를 조달하며 약 2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99% 정확도로 공장을 돌릴 수 있을까
범용 SaaS의 방어력은 연동과 익숙한 사용법에서 나왔다. AI로 데이터 이전과 설정이 쉬워지면 전환비용은 낮아진다. 반면 피지컬 AI의 핵심 데이터는 웹에서 긁어 올 수 없다.
로봇 학습에는 영상뿐 아니라 힘, 깊이, 접촉 정보가 필요하다. 사람이 장비를 착용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원본이 생긴다. Scale AI도 자체 시설에서 10만 시간 넘는 데이터를 확보했다.
현장으로 나오면 정확도의 마지막 1%가 특히 비싸다. 텍스트 초안은 100번 중 한 번 틀려도 고치면 된다. 생산라인은 어떤가. 단 한 번의 오류도 가동 중단이나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정확도를 99%에서 99.9%로 높이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에 따라 배치 속도가 달라진다.
기존 업무 시스템에 기능만 추가하는 방식도 취약하다. 플랫폼 사업자가 같은 기능을 직접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CompanyCam은 먼저 현장 사진을 위치, 프로젝트, 시간별로 정리하는 체계를 만들고 보고서 자동화를 붙였다. 원본 데이터를 직접 모으는 제품이 강한 이유다.
책임 문제도 진입장벽이다. EU 제조물책임지침은 2026년 12월 9일 이후 출시, 운용되는 독립형 소프트웨어와 AI를 제품으로 본다. AI 공급자가 제조자로 취급될 수 있어 구매자는 성능뿐 아니라 사고 책임도 함께 확인한다.
측정하고, 수집하고, 책임져라
AI 자본이 공장으로 향하려면 세 조건이 필요하다.
- 성과를 수치로 잴 수 있어야 하고, 공개 웹에서 얻기 힘든 데이터가 있어야 하며, 실패 책임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제조업은 불량률, 사이클타임(한 생산 주기를 완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 가동률로 성과를 측정한다. 센서와 검사 기록은 독점 데이터가 되고, 제조물책임 체계는 사고를 다루는 기준이 된다.
그렇다고 고객사 로고만으로 상용화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은 여러 공급사의 실증사업을 동시에 돌린다. 2026년 조사에서도 엔지니어링 조직의 80%가 AI를 시험했지만 본격적으로 확장한 곳은 9%뿐이었다. 첫 실험으로 충분할까. 두 번째, 세 번째 생산라인으로 확장됐는지가 중요하다.
로봇 실적 역시 출하량보다 가동 시간과 운영 시설 수로 판단한다. 시험과 상시 가동, 출하와 실제 운용은 서로 다르다.
유리한 제품은 원본 데이터가 생기는 지점을 차지한다. 사진과 센서, 검사 기록을 직접 모으고 자동화를 더하면 쓸수록 데이터가 늘어난다. 성과 과금도 정확도 계산법과 실패 처리 기준까지 계약에 담아야 지속된다.
게다가 미국에서 100만 달러 이상을 조달한 2023년 시드 투자 기업 중 다음 라운드로 간 비율은 24%였고, 2024년 기업은 16%에 그쳤다. 투자 간격은 길어지는데 공장 배치는 성과 확인에도 오래 걸린다. 그렇다면 제조 다음 기회는 산업 규모가 큰 곳보다 다른 데서 먼저 열릴 가능성이 크다. 측정 가능한 결과와 독점 기록을 이미 갖춘 법률, 건설 같은 분야다.
산업 AI 기업의 성장 속도는 기술 성능뿐 아니라 고객 조직이 검증에 쓰는 시간에도 묶인다. 자본은 빠르게 이동하지만 도입 판단의 속도는 생산 일정과 책임 검토 기간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