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을 넘어 제약회사가 된 에이전트
산업에서 AI를 쓴다고 하면 대개 질문에 답하는 대화 상자를 떠올린다. 실제로도 그럴까? 스탠퍼드 연구진이 2026년 2월 공개한 ‘버추얼 바이오테크’는 신약 초기 연구를 한 번의 모델 호출이 아니라 제약회사와 닮은 에이전트 조직에 맡겼다. 최고과학책임자 역할의 에이전트가 연구 질문을 작은 과업으로 나누고 유전학, 단일세포 데이터, 화학, 임상 분야의 전문 에이전트에게 배정한다. 각 분야의 결과를 비교하고 하나의 연구 판단으로 묶는 일도 최고과학책임자 에이전트의 몫이다. 이 시스템이 내놓는 결과는 대화 한 번의 답변보다 여러 부서가 공동으로 만든 연구 보고서에 가깝다.
규모가 커질수록 조직 방식의 차이가 드러났다. 3만 7천 개가 넘는 임상 담당 에이전트가 55,984건의 임상시험 기록을 구조화하고 약물의 표적 유전자와 연결했다. 사람 연구팀이 오랜 기간 나눠 맡을 수작업을 짧은 시간에 병렬로 처리했다. 이 데이터에서는 특정 세포 유형에서 주로 발현되는 유전자를 겨냥한 약물이 다른 약물보다 임상 1상에서 2상으로 넘어갈 확률은 40%, 시판 단계에 이를 확률은 48% 높았고 부작용 발생률은 32% 낮았다. 개별 답변의 정확도를 평가한 수치가 아니라 에이전트 조직이 새로 구축한 데이터셋에서 얻은 결과다. 표적 하나를 평가하는 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고 API 비용은 46달러였다. 표적 하나 평가에 하루와 46달러면 충분했다는 말이다.
직원만 늘리고 조직도는 비워 둔다는 착각
에이전트 수만 늘린다고 결과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버클리 연구진은 멀티에이전트 프레임워크 7종에서 수집한 실행 기록 1,600여 건을 분석해 실패 유형 14가지를 분류했다. 역할과 과업의 정의가 불분명하거나 에이전트 사이의 전달 내용이 맞지 않았고, 결과를 검증할 절차가 빠진 경우도 있었다. 역할 명세, 에이전트 간 소통, 검증 절차에서 생긴 문제는 모델 자체의 성능만 높여서는 고치기 어렵다.
모델만 키우는 일은 직원을 늘리고도 조직도를 비워 두는 것과 같다.

같은 모델을 쓰더라도 일을 나누고 확인하는 방식에 따라 전체 결과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버추얼 바이오테크는 어떻게 달랐을까? 담당 분야를 나누고 각 에이전트가 쓸 수 있는 데이터와 도구를 백여 개의 전용 도구로 제한했다. 임상 담당 에이전트가 화학 분석 도구를 임의로 쓰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역할의 경계를 시스템에 넣었다. 권한을 좁힐수록 역할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검토 에이전트가 결과를 읽고 수정을 요청하는 절차도 두어 주장과 근거가 남도록 했다. 연구진은 2025년 1월까지 공개된 자료만 허용한 상태에서 폐암 표적을 평가했고, 시스템은 항체로 암세포의 표적을 찾아 약물을 전달하는 B7-H3 표적 항체-약물 접합체를 제안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다이이찌산쿄와 머크가 개발하던 B7-H3 표적 항체-약물 접합체가 소세포폐암 치료제로 FDA 혁신치료제 지정을 받았다. 이후 공개된 사건이 제안의 현실성을 뒷받침했으며, 보존된 작업 기록으로 어떤 데이터와 판단을 거쳤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버티컬 AI의 해자는 모델이 아니라 업무다
앞의 운영 방식은 다른 산업에도 적용된다. 질문을 과업으로 나누고 역할별 담당과 접근 권한을 정하며, 결과를 다시 검토하고 판단 근거를 기록하는 방식은 법률, 보험, 의료 업무에도 쓸 수 있다. 다만 범용 모델 회사에는 병원의 진료 기록이나 로펌의 사건 자료, 보험사의 보상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 특정 산업의 AI 업체는 업무 흐름 안에서 허가받은 데이터를 확보해 범용 모델 업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산업별 용어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실제 업무에서 쓰는 자료와 도구에 연결돼야 한다. 규제 산업에서는 결정의 근거와 검토자를 나중에 재현할 수 있는 기록까지 제품에 포함되며, 기록이 없으면 결과가 맞더라도 컴플라이언스 검토를 통과하기 어렵다.

그런데 사람의 역할은 남는다. 어떤 연구 질문에 예산을 쓸지 정하고 실험 조건을 알려주는 일은 사람이 맡았으며, 수만 개 에이전트가 찾은 결과도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였다. 따라서 버티컬 AI를 설계할 때는 사용할 모델뿐 아니라 업무를 어떤 역할로 나눌지, 역할마다 어떤 데이터와 도구를 허용할지 정해야 한다. 결과를 검토할 사람이나 에이전트와 보존할 기록도 함께 정한다. 모델 이름보다 역할표와 권한표, 검토 절차가 도입 이후의 성능을 더 많이 좌우한다. 이 설계가 빠지면 재현 가능한 판단도 함께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