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웨이의 법칙은 원래 소프트웨어 조직을 향해 던진 경고였다. 시스템이 그 조직을 만든 사람들의 소통 구조를 그대로 닮는다는 주장이다. 이제 그 법칙이 멀티에이전트 구조에 적용되고 있다. 사람이 에이전트 역할을 미리 그려 넣는 방식이 최적인지, 아니면 아예 손을 떼는 편이 나은지에 대한 질문이 다시 열린다.

이만오천 번의 실험이 깬 이분법

2026년 3월 30일 공개된 논문 「Drop the Hierarchy and Roles」는 8개 LLM 모델과 4–256개 에이전트, 8가지 조정 프로토콜을 조합해 20,810개의 고유 설정에서 2만 5천 건이 넘는 태스크를 실행했다. 지금까지 나온 멀티에이전트 조정 실험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실험은 기초 검증 660건, 확장성 검증 8,020건, 다중 모델 검증 12,130건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이 규모는 이전의 소규모 사례 연구와는 다른 수준의 신뢰도를 확보하게 한다.

결과는 Sequential 프로토콜이 품질 점수 0.875로 1위를 차지했다. 이 방식은 발화 순서만 고정하고 역할 배분은 에이전트 자율에 맡긴다. 사람이 중앙에서 지휘하는 Coordinator는 0.767로 2위, 완전히 방임한 Shared는 0.503으로 가장 낮았다. Sequential은 완전 자율 방식보다 44%, 중앙집중 방식보다 14%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Cohen’s d는 1.86, p값은 0.0001 미만으로 나타나 우연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를 보였다.


자유가 클수록 좋다는 착각

콘웨이의 법칙을 멀티에이전트에 적용할 때 흔히 전제하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사람이 조직도를 그리듯 에이전트 역할을 미리 배정하거나, 에이전트에게 전권을 주고 알아서 하게 두거나다. 이번 실험은 그 이분법의 양 끝이 모두 최선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완전 방임에 해당하는 Shared는 최고가 아니라 최저 성능을 냈고, 완전 통제에 해당하는 Coordinator도 중간에 머물렀다.

완전 방임, 중앙 통제, 최소 제약 협력을 비교하는 세 장면

완전한 자유는 혼란으로, 과도한 통제는 수동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성능이 가장 높았던 지점은 단순한 순서만 제공한 최소 제약형 협력이었다.

논문은 이 현상을 내생성 역설(endogeneity paradox)이라 부른다. 순서 고정이라는 단 하나의 최소 제약이 자발적 역할 분화, 자발적 기권, 미션 정렬이라는 세 가지 자율 행동을 동시에 끌어낸다. 제약이 전혀 없으면 이런 자율성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이 설계해야 할 대상은 완성된 조직도가 아니라,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풀어줄지에 관한 선택이다. 전부 설계하거나 전부 방임하는 두 선택지 사이에 성능이 가장 높은 세 번째 지점이 있다.


제약 하나가 낳은 오천 개 역할

Sequential 프로토콜에서 발화 순서만 고정하자 8개 에이전트가 만들어낸 고유 역할 수는 5,006개에 달했다. 사람이 사전에 정의한 역할표는 하나도 없었다. 역할 안정성 지수(Role Stability Index)는 사실상 0으로 수렴했다. 역할이 한 번 정해져 고착되지 않고 태스크마다 새로 협상되고 재구성됐기 때문이다.

순서만 정해진 채 역할이 계속 바뀌는 에이전트들

발화 순서만 정했을 뿐 역할은 고정되지 않았다. 에이전트들은 과제에 따라 역할을 만들고 버리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 개입하지 않았다.

Coordinator 방식에서는 참여율이 사실상 100%로 강제된다. 반면 Sequential에서는 비참여 에이전트 60개 중 38개가 스스로 판단해 발언을 포기했다. 불필요한 개입을 줄이는 이 판단이 성능에 기여했다. 복잡도가 올라갈수록 시스템은 스스로 위계 깊이를 1.22에서 1.56으로 늘렸다. 사람이 미리 몇 단계 위계가 필요한지 정하지 않아도 문제 난이도에 맞춰 구조가 자동으로 재조정된 것이다. 순서 하나만 고정했을 뿐인데 역할·참여·위계 깊이까지 나머지 전부가 자율로 재구성됐다. 사람이 설계해야 할 변수의 개수가 생각보다 적을 수 있다는 신호다.


조직도를 베끼는 진짜 이유

실험 결과와 별개로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마케팅 에이전트, 리서치 에이전트, 실행 에이전트, 관리자 에이전트처럼 인간 조직의 직무명을 그대로 옮겨 붙인 구조가 주류다. CrewAI의 계층형 구조, LangGraph의 그래프 기반 구조, Google ADK 모두 오케스트레이터가 워커를 동적으로 생성하고 조율하는 형태를 기본값으로 제공한다. 오케스트레이터-워커 워크플로우 패턴은 성능이 검증돼서라기보다 사람이 이해하고 감사하기 쉬워서 채택되는 구조에 가깝다.

Forrester의 조직 자문 사례를 보면 다수 클라이언트가 운영 모델을 먼저 정리하지 않고 AI 플랫폼부터 고른다. 그 결과 시스템이 조직만큼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반복한다. 운영 모델이 불분명한 조직이 에이전트를 배치하면 그 불분명함은 사라지지 않고 기계 속도로 복제된다. 콘웨이의 법칙이 에이전트 시대에 경고하는 지점은 사람이 구조를 설계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 조직의 결함이 담긴 구조를 그대로 베껴서 생기는 문제다.


십 년 전 이미 나왔던 처방

소프트웨어 조직론에는 이미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이 있었다. 매슈 스켈턴과 마누엘 파이스가 제시한 팀 토폴로지는 콘웨이의 법칙을 거꾸로 이용하는 역콘웨이 전략(inverse Conway maneuver)을 제안한다. 조직 구조가 아키텍처를 결정하게 두는 대신 원하는 아키텍처를 먼저 그리고 그에 맞춰 팀 구조를 재설계하는 방식이다. 이 처방을 멀티에이전트에 옮기면 사람이 설계할 대상은 역할이 채워진 완성된 조직도가 아니라 원하는 협업 위상(topology)과 그 위상이 지켜야 할 최소 제약으로 바뀐다. 역할 배정 자체는 이만오천 번 실험이 보여줬듯 에이전트에 맡기는 편이 낫다.

경계선만 그리고 내부 구조는 스스로 형성되게 두는 설계

설계자는 모든 역할과 연결을 지정하지 않는다. 협업이 이루어질 공간과 경계 조건만 정하고, 실제 구조는 시스템이 문제에 맞게 다시 그리도록 둔다.

앤스로픽의 자체 리서치 시스템은 리드 에이전트와 병렬 서브에이전트로 구성된 같은 구조로 단일 에이전트 대비 90.2% 성능 향상을 기록했다. 이 처방의 성공 사례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토큰 비용이 15배로 뛰는 대가를 치렀다. 계층과 병렬 구조는 성능을 높이는 대신 비용을 그만큼 늘린다. 자연계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나타난다. 개미 군집은 중앙 지휘자 없이 페로몬이라는 환경 신호만으로 먹이 경로를 찾고, 덜 쓰이는 경로는 페로몬이 증발하며 자동으로 폐기된다. 스티그머지는 완전 방임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단 하나의 매개체로 작동하는 최소 제약형 조정이라는 점에서 Sequential 프로토콜과 원리가 겹친다.


자율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이만오천 번 실험은 예외 조건도 함께 밝혔다. 자기조직화가 이기려면 능력 있는 모델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약한 모델인 GLM-5 계열에서는 고정 구조가 자율 방식보다 9.6%p 더 높은 성능을 냈다. Claude Sonnet 4.6류의 강한 모델만 자율에서 3.5%p 이득을 봤을 뿐, 처방은 보편적이지 않다. 모델 능력이 임계치 아래면 자율은 오히려 손해다. 이 경우엔 사람이 짠 고정 구조가 여전히 낫다는 역전 현상이 관측된다. 역할을 풀어주라는 조언은 특정 능력 수준 이상에서만 성립하는 조건부 처방이다.

자율 배분이 늘어날수록 비용이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추적하기 어려워진다. 기업 환경에서 단계별 비용 귀속, 상한선 설정, 사전 승인 같은 통제 장치가 여전히 요구되는 이유다. 이는 성능과 무관하게 조직이 자율성의 폭을 제한하는 별도 근거가 된다. 조직 경계를 넘나드는 유동적 협력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할 A2A 프로토콜은 2026년 4월 기준 150개 이상 기관, 2만 2천 개 이상 깃허브 스타, 5개 언어 SDK를 확보하며 정식 표준(v1.0)에 도달했다. 다만 채택 만 1년을 갓 넘긴 초기 단계다. 기술적 가능성과 조직의 실제 채택 사이에는 아직 간극이 있다.


그려야 할 것은 조직도가 아니다

웰스파고가 오케스트레이터-워커 구조를 도입해 3만 5천 명 은행원이 1,700개 업무 절차를 찾는 시간을 10분에서 30초로 줄인 사례는 사람이 만든 구조가 여전히 실질적 가치를 낸다는 증거다. 문제는 구조 자체가 아니라 구조 안에서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풀어주는가에 있다. 콘웨이의 법칙이 던진 원래 경고, 시스템은 그것을 만든 조직의 소통 구조를 닮는다는 명제는 에이전트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다만 사람이 반영해야 할 조직의 정의가 바뀐다. 완성된 위계도가 아니라 미션과 순서, 경계 조건 같은 최소 제약의 집합으로 축소된다.

사람이 멀티에이전트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최적이냐는 질문에는 조건부 답이 나온다. 역할표를 그리는 방식의 설계는 최적이 아니고, 최소 제약과 협업 위상을 그리는 방식의 설계는 최적이다. 둘 다 설계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람이 손대는 대상의 층위가 다르다. 실무적 판단 기준은 다루는 모델이 능력 임계치를 넘는지, 그 태스크에 순서 같은 최소 제약 하나를 줄 수 있는지 두 가지뿐이다. 이 조건이 갖춰지면 나머지 역할 배분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매 순간 다시 그리게 두는 편이 낫다.

결국 사람이 그려야 할 것은 조직도가 아니라, 에이전트가 스스로 다시 그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경계선이다. 그 선이 너무 굵으면 자율이 질식하고, 너무 없으면 자율이 방향을 잃는다. 지금 필요한 설계는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이 매번 새로 그려질 수 있게 남겨 두는 여백의 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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