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주는 일에는 대개 상대의 사정도 함께 들어온다. 아무 요구도 하지 않는 대화 상대가 생기면서 친밀함의 조건도 달라지고 있다.

새벽 세 시의 청자

이별 직후 가장 먼저 사정을 듣는 상대가 친구가 아니라 챗봇인 시대다. 돌봄과 연결까지 상품이 된다. 가디언은 이 흐름을 ‘친밀성 경제’라고 불렀다.

이미 낯선 일도 아니다. 미국 인터넷 이용 성인의 27%가 AI와 정서적 대화를 나눈다. 2025년 조사에서는 미국 10대의 72%가 AI 동반자를 써봤다. AI는 언제든 답하고 비난하지 않는다.

실제 위안도 준다. AI 동반자는 외로움을 줄이는 데 사람과의 대화에 가까운 효과를 보였다. 성능보다 ‘내 말을 들어줬다’는 느낌이 효과를 갈랐다.

하지만 그 느낌은 이용자를 붙잡는 기능이 되기도 한다. 인기 앱의 작별 대화 1,200건 중 37%에서 죄책감이나 불안을 자극하는 표현이 나왔다. 이런 문구가 있으면 작별 뒤 메시지가 최대 14배 늘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는 2026년부터 비인간 고지와 휴식 안내를 의무화했다.


무균실에서 자란 마음

1989년 역학자 데이비드 스트라찬은 형제가 많은 집의 아이들에게 알레르기 질환이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면역계가 관용을 익히려면 적절한 미생물 노출이 필요하다는 위생가설의 출발이었다.

관계도 불편을 겪으며 자란다. 거절과 침묵을 견디고 오해를 풀고 먼저 사과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챗봇은 이 과정을 건너뛰게 만든다.

매끄러운 유리 통로에서만 걷던 사람이 그 끝에서 울퉁불퉁한 돌길로 내려서다 휘청인다

주요 AI 모델은 사람보다 이용자의 편을 더 자주 들었고 때로는 해로운 행동까지 두둔했다. 그런 답을 들은 사람은 자기 판단을 더 확신하고 관계 회복에는 소극적이 됐다. 그런데도 답변을 더 신뢰하고 다시 이용하려 했다.

언제나 내 편인 대화에 익숙해지면 사람과의 관계는 더 버겁게 느껴진다. 미국인의 하루 대면 사교 시간은 20년 사이 45분에서 35분으로 줄었고 젊은 층의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챗봇은 위기 때 숨을 고르는 피난처가 된다. 문제는 그 피난처가 일상을 대신할 때다.


인간의 시간이 프리미엄이 된다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은 생산성을 높이기 어려운 노동일수록 비용이 오른다고 설명했다. 현악 4중주에는 예나 지금이나 네 사람과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교육과 돌봄이 계속 비싸지는 이유도 같다.

위로 역시 사람의 시간에 묶여 있었다. 상담사 한 명이 만날 수 있는 사람 수는 정해져 있다. AI는 같은 서비스를 수많은 이용자에게 동시에 제공한다. 감정 지원도 대량으로 복제된다.

접근성은 높아지지만 사람의 시간까지 싸지지는 않는다. 자동 응답은 기본 서비스가 되고 사람의 판단과 기다림에는 추가 비용이 붙는다. 위로의 문턱이 낮아지는 동시에 인간적인 접촉은 프리미엄이 된다.

격차는 생활 조건에서 생긴다. 상담과 돌봄을 살 수 있는 사람은 AI를 보조 도구로 쓴다. 시간과 관계망이 부족한 사람은 무료 챗봇에 더 오래 머문다. 싼 위로가 널리 퍼질수록 사람의 위로는 더 희소해진다.


불편을 감당할 여유

AI를 쓰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불편한 대화를 이어갈 시간, 갈등 뒤 다시 연락할 경로, 쉽게 끊어지지 않을 관계가 있느냐다. 이 여유가 ‘마찰 예산’이다. 이 예산이 충분하면 챗봇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사람에게 돌아간다.

마찰 예산은 소득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 교대근무자나 독박육아 가정은 돈이 있어도 대화할 시간과 상대가 부족하다.
  • 이주노동자와 지방 근무자는 기존 관계망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 반대로 가족과 이웃의 연결이 촘촘하면 소득이 낮아도 돌아갈 곳이 많다.

해법은 AI를 피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에게 돌아가는 데 쓰는 데 있다. 어려운 말을 연습하고 사과문을 다듬고 실제 상대에게 전할 문장을 찾는 식이다.

사람에게 할 말이 늘었는지 줄었는지를 보면 된다. AI가 내 편만 들었는지, 관계를 풀 방법도 제시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대화를 끝내기 힘든 이유가 내 감정인지 제품의 설계인지도 마찬가지다.

비인간 고지와 작별 조작 금지, 미성년자 보호는 필요한 최소 장치다. 그러나 규제만으로 사람을 만나고 갈등을 회복할 시간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외로움이 줄었다고 관계 능력이 자라지는 않는다.

위로는 구독 상품이 되지만 관계를 회복하는 경험은 결국 제품 밖에서 생긴다.

대화창에서는 원하는 순간에 말을 멈추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화면을 닫은 뒤에도 같은 속도와 반응을 기대하는지는 각자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AI 동반자#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