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연기자가 등장하면 제작비보다 먼저 계약의 경계가 달라진다. 화면에 나타난 결과가 같아 보여도 시장은 제작에 참여한 주체와 허락의 범위를 따져 가격을 정한다.

빈 배역과 남은 스태프

2026년 7월, 영국 제작사 Particle6는 AI 캐릭터 틸리 노우드가 주연을 맡은 영화 Misaligned를 발표했다. 배우는 합성이지만 각본과 연출, 편집은 사람이 맡았다. 제작사는 이들을 AI 제작 환경에 맞게 재교육했다고 밝혔다. 인간의 노동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주연 배우의 이름만 크레딧에서 빠졌을 뿐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이 인류의 작업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수치심을 느끼는 AI다. 하지만 현실의 쟁점은 정체성보다 노동에 가깝다. 배우 노동조합 SAG-AFTRA는 틸리를 전문 배우들의 작업을 허락과 보상 없이 학습한 프로그램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음악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이미 빠르게 진행 중이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Deezer에 따르면 2026년 6월 하루 평균 약 9만 곡의 AI 생성곡이 업로드됐고, 특정일에는 신규 업로드의 절반을 넘기도 했다. 그 가운데 AI 가수 자니아 모네의 얼굴과 목소리는 생성 도구가 만들었지만 가사는 시인 텔리샤 ‘니키’ 존스가 썼다. 자니아가 차트에 오르자 홀우드 미디어는 약 300만 달러에 계약했다. 시장은 넘쳐나는 음원보다 그 뒤에 있는 창작자를 더 비싸게 평가했다.


피아노 롤이 남긴 2센트

기계가 연주를 복제하기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미국 대법원은 1908년 자동피아노의 천공 롤(구멍으로 연주 정보를 기록한 종이 롤)을 악보의 복제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작곡가는 로열티를 받지 못했다. 이는 오늘날 학습 데이터를 작품의 복제로 볼지, 계산 재료로 볼지 다투는 모습과 닮았다.

의회는 이듬해 법을 고쳤다. 누구나 곡을 녹음할 수 있게 하되 복제물 한 장당 2센트를 내도록 했다. 녹음 때문에 생연주 일자리가 줄자 음악가들은 1942년 상업 녹음을 거부했고, 약 2년간의 파업 끝에 음반 수익 일부를 실직 연주자에게 돌리는 길을 열었다. 복제를 막는 대신 사용량에 값을 매기고 노동자에게 몫을 돌렸다.

그 연장선에서 Anthropic은 저작권 집단소송에서 책 한 권당 약 3천 달러를 지급하는 합의를 승인받았다. 한편 Universal Music Group과 AI 음악 생성 서비스 Udio는 동의받은 음악만 학습해 수익을 나누기로 했다. 그렇다면 회사가 받은 돈이 실제 창작자에게까지 갔을까. 확인되지 않았다.


손이 닿은 흔적

결과물이 같아 보여도 값은 같을까. 겉모습이 같은 작품도 제작 과정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예일대 심리학자 조지 뉴먼과 폴 블룸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기성 부품을 조립한 조각보다 재료를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조각을 높게 평가했다. 관객은 결과물뿐 아니라 그 제작 이력에도 돈을 낸다.

똑같이 생긴 두 그릇인데, 손자국이 남은 쪽에만 저울이 기운다

AI 작품도 마찬가지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인간의 그림과 이를 모방한 생성 이미지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그런데 AI가 만들었다는 표시가 붙자 제시 금액은 62% 낮아졌다. 글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험에서도 같은 시와 이야기는 컴퓨터가 썼다고 알려졌을 때 더 낮은 평가를 받았다. 품질만큼 저자의 정체가 중요했다.

따라서 AI 표시는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작품의 가격을 만드는 정보다. 실제로 EU AI법은 2026년 8월 2일부터 생성, 조작 콘텐츠에 표시 의무를 단계적으로 도입했고, 위반 시 최대 1,500만 유로 또는 세계 연 매출의 3%를 제재할 수 있다. 겉으로 구별하기 어려울수록 출처를 밝히는 라벨의 가치는 커진다.


누가 사용 조건을 거부할 수 있는가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 표정과 타이밍은 데이터가 되어 반복 출력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원천을 제공했고 어떤 조건으로 허락했는지는 계약과 표시로만 증명할 수 있다. 합성 배우는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도 그 사람의 동의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배우의 노동은 카메라 앞 연기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보상 기준을 출연 일수와 재방송 횟수에서 학습 데이터의 지분, 출력 횟수, 원본과의 유사성까지 넓혀야 한다. 기업 단위로 지급된 로열티가 실제 배우와 가수에게 이어지는 장치도 필요하다.

하지만 합성 배우는 지시는 수행해도 사용 조건은 거부하지 못한다. 동의는 누가 할 수 있는가.

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복제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허락을 철회할 권리는 더 값비싼 자산이 된다.

그 권리를 지키려면 데이터 사용 기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배우는 어떤 장면과 음성이 학습에 쓰였는지, 결과물이 원본과 얼마나 닮았는지 확인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기록이 없다면 자신의 연기가 몇 번 복제돼도 보상을 요구할 근거조차 얻지 못한다.

복제 비용이 낮아질수록 희소한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거래 조건이 된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관객과 시장은 무엇을 볼 것인지뿐 아니라 어떤 관계에 비용을 지불하는지 선택하게 된다.


#AI 산업#창작#진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