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시세가 5분 만에 나온다. 감정평가사가 현장을 방문하던 사흘은 사라지고, AI가 그 자리를 채운다. 속도는 이미 현실이 됐다. 문제는 그 속도가 가져오는 다른 변화에 있다.
5분 만에 뜨는 아파트 시세
은행이 담보대출을 심사할 때 감정평가사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값을 매기는 데는 보통 사흘 이상 걸렸다. 그때마다 수수료도 따로 붙었다. 2024년 국내 한 대형 시중은행은 이 과정에 자체 AI 모델을 넣었다. 동·호수 단위로 시세를 계산했고, 50가구 미만 아파트 단지 9천여 곳의 담보평가 시간을 5–10분으로 줄였다. 수수료도 없앴다.
2026년에는 한 단계 더 나갔다. 같은 은행 계열의 부동산 플랫폼은 6월 ‘단지분석·비교’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층수·향·면적·리모델링 여부까지 반영해 실시간으로 값을 뽑는 ‘AI추정가’ 기능을 붙였다. 시세와 학군, 교통, 개발 호재를 요약해주는 ‘AI 브리핑’도 함께 넣었다. 같은 해 1월에는 부동산플래닛이 대화형 AI 에이전트 ‘플래닛AI’를 열었다. 아파트부터 상가·토지까지 물으면 AI가 추정한 시세와 실제 거래가를 한 답변으로 묶어 보여준다. 국내 프롭테크 업계가 2026년을 ‘시세 조회’에서 ‘시세 판단’으로 넘어가는 해로 보는 이유다.
정확도는 자산 종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거래가 많고 규격이 비슷한 아파트·오피스텔은 AI 시세가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반대로 거래량이 적고 개성이 강한 구분상가나 지방 토지는 아직 믿기 어렵다는 게 업계 평가다.
미국 정책연구기관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는 자동으로 집값을 계산하는 모델(AVM)의 정확도가 사람 감정인보다 나아진 경우도 있다고 인정한다. 다만 성과가 일관되지 않고, 특히 유색인종·저소득 지역에서 편차가 크다고 지적해왔다. 2026년 발표된 한 연구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 오클랜드 주택 거래를 분석한 결과, 집을 사는 사람의 특징이 이미 실제 거래 가격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AI 추정가와 실거래가의 차이를 단순히 AI의 오류로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속도는 이미 검증됐다. 그러나 그 속도가 은행 대출이나 재건축 분담금처럼 재산 전체가 걸린 결정까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가격은 보는 순간 움직인다
조지 소로스는 금융시장을 설명하며 이런 구조를 지적했다. 가격이 객관적인 기초 여건을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다. 가격 자체가 사람들의 기대를 바꾸고, 그 기대가 다시 기초 여건을 움직인다. 그는 이 현상을 재귀성(reflexivity)이라고 불렀다.
2025년 발표된 AI 부동산 가치평가 연구도 비슷한 순환을 지적한다. AI가 뽑아낸 시세가 매물 호가에 반영되고, 그 호가가 다시 다음 모델의 학습 데이터가 된다. 상승장에서는 낙관적인 AI 시세가 매도 호가를 끌어올리고, 높아진 호가가 다음 모델을 더 낙관적으로 만든다. 스스로 강화되는 구조다.
2008년 금융위기 직전 미국 주택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감정가가 계속 위로 치우치면서 위기의 한 원인이 됐다. 감정가가 오르자 ‘지금 안 사면 놓친다’는 확신이 퍼졌고, 그 매수세가 다시 감정가를 밀어올렸다.
전통 감정평가는 이미 일어난 거래를 나중에 기록하는 후행 지표였다. 반면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AI 시세는 그 자체로 다음 거래의 기준점이 된다. 스스로 만들어 낼 미래를 앞서 가리키는 선행 변수로 바뀌는 것이다.

도장 값이 보증해온 것
영상의학과는 이미 AI가 가장 깊게 들어간 의료 분야다. FDA가 승인한 AI 진단기기 1,451개 가운데 76%가 여기에 몰려 있다. 그런데도 2025년 설문에서 전문의의 47.7%는 “AI가 전부 쓴 판독 소견을 환자가 그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일부 병원은 AI를 2차 판독자로만 쓴다. 의사가 먼저 영상을 읽고, AI 소견이 일치하면 확정하고, 갈릴 때만 다시 본다. 오진은 줄어도 법적 책임은 여전히 의사 한 사람에게 남는다.
부동산 감정에서는 이런 규칙조차 아직 없다. AI 시세와 감정평가사의 판단이 다를 때 누가 최종 서명하는지, 그 서명이 무엇을 보증하는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실제 판결도 있다. 1990년 한 토지 감정에서 감정평가업자와 감사원·법원 감정인의 평가액이 크게 차이가 났다. 대법원은 “법령상 격차율만으로 현저한 차이를 판단할 수 없다. 고의·중과실과 단순 과실을 구분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2015년 서울의 한 재건축 조합에서는 감정평가사가 전면·개방형 상가를 측면·후면·폐쇄형으로 잘못 분류해 위치 가치 점수를 낮게 매긴 사실이 드러났다. 법원은 관리처분계획을 취소했고, 대법원도 그대로 확정했다.
감정가가 높을수록 그 감정평가사에게 일이 다시 들어오는 구조도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 대면 감정 30만 건 이상을 다시 살펴본 조사에서는 39%에서 데이터 오류가 나왔다. 이 책임 체계는 언제나 ‘누가 도장을 찍었는가’를 전제로 만들어졌다. 사람은 틀려도 이름과 도장이 남는다. AI 시세에는 도장이 없다.
지금 한국에서는 그 도장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2025년 9월 “은행이 소속 감정평가사를 고용해 담보 감정을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감정평가법 위반”이라는 공식 해석을 냈다. 평가하는 사람과 그 평가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같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은행권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자체평가를 계속했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는 2026년 7월 금융위원회에 전면 중단을 공식 요구했다. 금융위가 내놓은 절충안은 자체평가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수준에 그쳤다. 협회는 이 안이 국토부 해석과 어긋난다며 은행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한 상태다.
평가하는 주체와 그 결과로 이익을 보는 주체가 같아지는 순간, 도장의 의미는 무너진다. 은행이 감정평가사를 직접 고용해도 이미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은행이 만들고 소유한 AI 모델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충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눈에 안 보이게 될 뿐이다.

숫자 뒤에는 책임이 있다
이원화된 체계는 이미 시작됐다. 앞서 본 은행은 AI 시세를 50가구 미만의 표준화된 아파트 담보평가에만 쓴다. 규격이 일정하지 않은 자산이나 고액 거래, 분쟁 가능성이 있는 사안은 여전히 사람 감정평가사의 몫으로 남겨 둔다. 영상의학과에서 AI를 2차 판독자로만 쓰는 것과 같은 경계선이다.
그러나 감정평가사협회와 금융당국의 충돌은 이 경계선이 정확도만으로 그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은행이 직접 고용한 감정평가사든, 은행이 만든 AI 모델이든 상관없다. 평가하는 주체가 이해당사자와 분리되지 않으면, 아무리 정확한 숫자라도 법적·제도적 신뢰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게 국토부 공식 해석의 논리였다.
미국 최대 부동산 플랫폼 질로우의 자동추정가 서비스 ‘제스티메이트’를 두고도 비슷한 판단이 나왔다. 재산세 분쟁을 다루는 인디애나주 세금항소위원회는 이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데이터와 공개되지 않은 방법론에 기대 만든 추정치는 법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집값을 최종적으로 정하는 주체는 AI도, 감정평가사 개인의 직관도 아니다. 그 숫자에 도장을 찍고 법적 책임을 떠안는 자리다. AI는 그 도장을 대신 찍어줄 수 없다. 도장을 찍기 전에 검토해야 할 범위를 좁혀줄 뿐이다.
거래가 표준화돼 있고 오차가 작더라도, 그 숫자로 생길 손실을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재건축 분담금이든, 전 재산을 건 담보대출이든 마찬가지다. 그 경계를 넘는 순간, 도장을 찍을 사람이 필요해진다. 그 경계선을 계속 다시 긋는 일이 AI 시대 감정평가사에게 남은 실제 업무다.
집값을 최종적으로 정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그 숫자에 도장을 찍고 책임을 지는 자리다. AI는 그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경계선은 계속 다시 그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