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업무 시스템을 새로 도입하면 처리 속도도 자연히 빨라진다고 본다. 하지만 직원이 여러 도구를 오가며 자료를 옮기고 기준을 확인해야 한다면 새 화면은 업무 방식까지 바꾸지 못한다.
시스템만 바꿔서는 빨라지지 않는다
ERP를 교체해도 업무는 정말 빨라질까. 속도가 그대로인 회사가 많다. 시스템은 새것이지만, 업무를 늦추는 규칙과 단절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통합 구조와 업무 규칙, 책임자를 미리 정하지 않으면 기존 문제가 새 ERP로 옮겨갈 뿐이다. ERP의 실패 요인은 가동일보다 플랫폼 선정 단계에서 먼저 만들어진다.
실제로 버밍엄 시의회는 2022년 Oracle ERP를 도입했지만 은행조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20억 파운드 규모의 거래가 잘못된 회계연도에 기록됐고, 사업비는 최초 1,900만 파운드에서 1억4,440만 파운드로 불어났다. 결국 표준 기능으로 다시 구축하고 은행조정만 외부 솔루션으로 분리하기로 했다.
짐머 바이오메트도 아홉 개 ERP를 S/4HANA로 통합하다 가동일을 네 차례 미뤘다. 가동 후에는 출하와 인보이스 발행, 매출 보고에 장애가 이어졌다. 문제는 개별 화면이 아니라 주문, 창고, 재무를 잇는 업무 흐름 에 있었다.
이처럼 주문에서 청구로, 창고에서 회계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실제 업무가 이뤄지지만, 기업은 화면과 기능만 검수한다. 평균적인 기업은 957개 애플리케이션 중 27%만 연결해 운영한다. 나머지 구간은 직원이 파일을 내려받고 숫자를 맞추며 메운다.
시스템의 빈틈은 사람이 메운다
이렇게 쌓인 통합 부채의 비용은 IT 예산이 아니라 사람의 근무 시간에 나타난다. 수작업 대사, 중복 승인, 엑셀 재집계, 숫자를 맞추는 회의가 대표적이다. 비용도 여러 부서의 인건비와 초과근무 항목에 나뉘어 있어 파악하기 어렵다. 버밍엄 시의회는 수작업 우회 절차에만 500만 파운드 이상을 썼다.
업무가 멈추지 않은 것은 시스템이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직원이 자동화의 빈틈을 대신 메웠기 때문이다.
그 빈틈을 메우려고 시스템을 일대일로 연결하면 앱 하나를 추가할 때마다 관리 대상도 늘어난다. 그래서 미션 오스트레일리아는 여러 플랫폼을 각각 연결하는 대신 한 번 통합하는 구조 를 택했다.
연결 기술뿐 아니라 시스템마다 승인 절차가 다르고 매출이나 활성 고객의 정의도 다르다는 점이 문제다. 기술은 예산으로 고칠 수 있지만, 업무 기준은 부서 간 합의가 필요해 해결에 시간이 더 걸린다. 여기에 커스터마이징까지 늘어나면 지금의 예외가 다음 ERP 교체 비용을 높일 수밖에 없다.
AI 에이전트는 숨은 문제를 드러낸다
AI 에이전트는 새로운 통합 문제를 만들기보다, 직원이 경험으로 메워 온 데이터 공백과 규칙 충돌을 드러낸다. 사람은 비어 있는 값을 다른 시스템에서 찾고 예외를 알아서 처리한다. 에이전트도 그럴까. 에이전트는 문서와 데이터에 적힌 규칙에 의존한다.
실제로 2026년 조사에서 IT 리더의 86%는 통합이 부족하면 에이전트가 가치보다 복잡성을 키운다고 답했다. 기업은 평균 12개 에이전트를 운영하지만 절반은 다른 에이전트와 단절돼 있다. SaaS에서 벌어진 난립이 에이전트에서도 반복된다.
MCP(Model Context Protocol) 같은 표준은 연결 방식을 통일해 개발 부담을 낮춘다. 그러나 데이터의 의미까지 통일하지는 못한다. 시스템마다 마감된 월이나 미결 항목의 뜻이 다르면 서로 다른 숫자를 더 빨리 전달할 뿐이다. 인증과 확장성, 거버넌스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결국 월마감과 인보이스 발행도 계정, 기간, 고객, 사용량의 기준이 맞아야 자동화된다. 기준이 엇갈린 상태에서 에이전트를 도입해도 수작업 대사는 없어지지 않는다. 명칭만 에이전트 예외 검토로 바뀔 뿐이다.
연결 자체를 구축 결과물로 봐야 한다
ERP를 바꿔도 시스템 사이의 합의를 그대로 두면 회사는 계속 느릴 수밖에 없다. 통합 설계는 플랫폼 선정 단계에서 함께 시작한다. 핵심 인터페이스가 표준 API를 지원하는지도 벤더 심사 항목에 넣는다.
각 인터페이스에는 별도의 책임자를 둔다. 주문에서 재무로 넘어가는 흐름에 주인이 없으면 장애가 나도 양쪽 부서는 서로를 탓한다. 책임자는 처리 건수와 지연 시간, 재처리 결과, 스키마 변경까지 관리한다. 그래야 월말 초과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문제를 발견한다.
또한 ERP 코어는 가능한 한 표준 기능으로 유지하고, 기업 고유 기능은 공개 API와 이벤트로 연결된 외부 영역에 두는 편이 낫다. SAP도 코어와 분리된 확장과 공개 API 사용을 권고한다. 커스텀 코드가 많을수록 다음 이행 때 정리할 부담도 커진다.
성과 기준도 달라진다. 일정과 예산뿐 아니라 수작업 대사 시간, 마감, 청구 주기, 책임자가 지정된 인터페이스 비율도 측정 대상이다. ERP 프로젝트는 가동일이 아니라 수작업 우회와 숫자 논쟁이 사라질 때 끝난다.
시스템의 사용 기간은 도입일부터 세지만, 조직이 치르는 비용은 예외 처리가 일상이 된 순간부터 커진다. 다음 교체 시점을 논의할 때도 오래된 화면보다 남아 있는 수작업의 위치가 더 정확한 단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