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제안한 ‘캐롤라이나 원칙’을 G20 혁신 장관들이 채택했다고 백악관이 발표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2026년 9월 1–2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G20 혁신장관회의가 열렸다. 주최는 미 상무부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이다. 상무장관 하워드 루트닉과 OSTP 실장 마이클 크라치오스가 공동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백악관은 G20 회원국 장관들이 합의 성명을 냈다고 밝혔다. 성명은 혁신 친화적 정책 틀, 기회와 번영을 위한 기술, 숙련 기술인력, AI 지식재산, AI와 표준, 산업 혁신과 공급망 투자 등 6개 축을 담았다. 이와 별도로 ‘신흥기술을 위한 캐롤라이나 원칙(Carolina Principles for Emerging Technologies)’에도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루트닉은 기자회견에서 G20 회원국이 미국이 제안한 가벼운 거버넌스 지침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고 말했다. 합의를 끌어내는 데 “엄청난 양의 작업”이 필요했다고도 했다.
같은 주 애슈빌에서는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따로 열렸다. 채플힐 회의는 12월 마이애미 G20 정상회의를 앞둔 미국 주최 일정의 일부다.
원칙이 실제로 말하는 것
루트닉이 기자회견에서 정리한 캐롤라이나 원칙은 세 가지다.
- 발견을 빠르게 하기 위해 기초 연구에 투자한다.
- 개발과 사업화 경로를 강화한다.
- 신뢰할 수 있는 도입·배치를 위해, 가능한 곳에서는 기존 분야별 규칙을 적용하고 새로운 규제는 ‘새로운(novel) 고려사항’에만 남긴다.
크라치오스는 회의에서 “정책 입안자가 혁신마다 따로 접근할 필요는 없으며, 모든 신흥기술을 처음 보는 정책 문제로 다루면 안 된다”고 말했다. 로이터가 사전 연설문과 현장 발언을 통해 전한 내용이다. 백악관 관계자는 G20 회원국에 AI 전담 규제기구를 신설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로이터에 확인했다.
백악관 성명에 적힌 표현은 이보다 부드럽다. 원칙이 기초 연구 투자, 사업화 경로 강화, 신뢰할 수 있는 기술 도입·배치를 요청한다고만 적었다. ‘새 규제기구를 만들지 말라’는 문장은 성명 요약에는 없다.
같은 회의에서 나온 다른 산출물도 있다. 백악관은 AI 번영 목표(AI Prosperity Objectives)와 AI 번영 협약(AI Prosperity Compact)을 언급했다. 기술인력 양성과 민관 협력을 확대하는 장치로 설명됐다. 루트닉은 저작권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했다. AI 기업이 창작물을 학습에 쓰는 길을 열되 창작자를 보호하는 틀이 필요하다고 했고, 미국의 ‘공정이용(fair use)’ 개념을 거론했다. 구체적 기준은 제시하지 않았다.
합의의 성격: 조약이 아니다
이번 문서는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이 아니다. G20 장관급 합의 성명과 원칙 선언이다. 국내법 개정 의무, 이행 점검 기구, 제재 조항은 확인되지 않았다.
몇 가지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 백악관은 ‘컨센서스 성명’과 캐롤라이나 원칙 합의를 공식 발표했다.
- 루트닉은 회원국 만장일치 지지를 주장했다.
- 크라치오스는 1일 기자들에게 중국도 원칙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문서 사본은 공개하지 않았고, 중국 대사관은 로이터 질의에 즉시 답하지 않았다.
- 회의 참석국·기구 목록에는 중국, 유럽연합, 일본, 인도, 한국, 러시아, 아프리카연합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중국이 서명했다’는 말은 미국 측 구두 발표로 남아 있다. 베이징이 같은 문구를 공식 확인한 자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만장일치라는 표현도 법적 비준이 아니라 장관급 정치 합의로 읽는 것이 맞다.
‘새로운 상황만 새 규칙으로 다룬다’는 문장 역시 해석 여지가 크다. 무엇이 novel한지는 각국이 정한다. 기존 소비자보호법, 경쟁법, 개인정보법, 제조물책임법으로 AI를 다루는 나라와, 별도 AI법을 이미 만든 나라가 같은 문장에 서명할 수 있는 이유다.
미국이 이 틀을 밀어 올린 이유
트럼프 행정부의 국내 AI 기조와 같다. 새 범용 AI 감독기구를 두지 않고, 분야별 기존 법으로 다루며, 정말 새로운 위험만 추가 규칙으로 본다는 입장이다. 크라치오스와 루트닉은 이 틀을 국제 회의의 공통 언어로 만들려 했다.
배경은 세 갈래다.
- 수출과 표준. 미국은 칩, 클라우드, 모델, 거버넌스를 묶어 ‘미국 AI 스택’을 우방국에 팔겠다는 정책을 이미 운용 중이다. 상대국이 전담 규제기구와 사전 승인제를 만들면 출시 속도와 계약 조건이 달라진다.
- 중국과의 모델 경쟁. 루트닉은 중국의 공개 가중치(open-weight) 모델이 미국 대형 언어모델을 ‘학습하는 학생’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이 최전선을 유지해야 리드가 유지된다는 논리였다. 동시에 중국 과기부 장관 인허쥔과 양자 회담을 했고, 크라치오스는 회담을 “훌륭했다”고 평가했다.
- 국내 정치. 데이터센터 입지와 전력·용수 갈등이 11월 중간선거 이슈로 떠올라 있다. 회의장 밖에서는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문제 삼는 시위가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규제 완화를, 대내적으로는 인프라 반발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 백악관 AI 책임자 데이비드 색스는 화상 발언에서 AI 출시를 사전 승인하는 기구는 “AI판 차량국(DMV)”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측이 반대하는 모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표현이다.
유럽은 같은 자리에 앉아 다른 일을 했다
유럽연합은 회의장에 있었다. 기술주권·안보·민주 담당 집행부위원장 헤나 비르쿠넨과 경제 담당 집행위원 발디스 돔브롭스키스가 참석했다. 비르쿠넨은 사전에 신뢰와 혁신을 함께 가야 하며, 규제 파편화를 줄이기 위한 상호운용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럽의 InvestAI(2,000억 유로 동원), AI 팩토리 19곳, AI 기가팩토리 계획도 강조했다.
같은 주 유럽위원회는 세계 AI 기업 30곳 이상에 정보제공 요청을 보냈다. AI법(AI Act) 이행 점검의 예비 단계다. 투명성 규칙은 8월부터 적용됐고, 위원회 대변인은 요청이 안전과 저작권 준수에 초점을 둔다고 했다. 비르쿠넨은 “유럽 시장에서 영업하려면 우리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비르쿠넨은 회의 현장에서 미·유럽 차이가 실제로는 크지 않다고도 했다. 유럽은 사전 규제, 미국은 소송으로 같은 행위를 사후에 다룬다는 취지였다. 혁신과 규제를 대립으로 보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유로바로미터에서 유럽 응답자 80%가 AI의 신중한 규제가 안전에 중요하다고 답했다는 점도 들었다.
정리하면, EU는 캐롤라이나 원칙이 담긴 장관 성명에 참여하면서도 AI법 집행은 멈추지 않았다. 원칙 합의가 유럽의 기존 법 일정을 바꾸었다고 보기 어렵다.
기업 발언은 한 방향이 아니었다
미국은 최고경영진을 같은 자리에 앉혔다. 루트닉은 엔비디아 젠슨 황, 앤트로픽 톰 브라운, 오픈AI 샘 올트먼, 팔란티어 알렉스 카프와 대면 대담을 했다. 1일차에는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데미스 허사비스, 데이비드 색스가 화상으로 나왔다.
방향은 대체로 규제 최소화였지만 강조점은 갈렸다.
- 황은 AI를 물·전기·인터넷과 같은 인프라로 규정하고, 각국이 데이터센터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론적·가상적 해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해를 규제하라”고 말했다.
- 올트먼은 모든 나라가 데이터센터를 직접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일부는 다른 나라 시설을 임차할 수 있다고 했다.
- 허사비스는 AI 시스템에 대한 안전 시험 체계를 만들자고 했다. 미국 정부가 내세운 ‘새 기구 금지’와는 결이 다른 요구다.
- 저커버그는 공개 가중치 모델을 규제하지 말라고 했다.
- 머스크는 EU 기술 규제가 진전을 막는다고 비판하고, 데이터센터용 신규 전원 확충을 요청했다.
기업 메시지가 곧 합의문은 아니다. 다만 회의 설계 자체가 미국 행정부와 미국 기업이 같은 방향으로 말하는 장면을 만드는 데 맞춰져 있었다.
중국 서명의 의미와 한계
중국이 원칙에 이름을 올렸다면, 미국으로서는 상징적 성과다. AI 거버넌스에서 미·중이 한 문장에 같이 들어간 사례는 드물다. 공개 가중치 모델 확산, 수출통제, 안보 우려가 겹친 시점에 나온 합의라 더 눈에 띈다.
그러나 집행 수단은 없다. 중국은 이미 생성형 AI 서비스 신고·보안 심사, 알고리즘 등록 등 자국 제도를 운영 중이다. 캐롤라이나 원칙의 “기존 분야별 규칙 + 새로운 위험에만 새 규제”는, 베이징 입장에서는 자국 제도를 유지한 채 서명할 수 있는 문장이다. 미국이 원하는 ‘전담 기구를 만들지 말라’는 해석을 중국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루트닉의 ‘선생-학생’ 비유와 중국 서명 발표가 같은 회의에서 나온 점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기술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다자 문서에서는 중국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쪽을 택했다. 12월 정상회의와 이후 미·중 정상 접촉을 염두에 둔 외교적 선택으로 읽는 편이 맞다.
시장과 규제에 남는 공백
기업·투자자 입장에서 이번 합의가 바로 바꾸는 것은 제한적이다.
- 출시 속도. 미국과 규제 완화를 선호하는 국가에서는 전담 승인 기구가 생길 명분이 줄었다. 다만 EU AI법, 개별국 안전·저작권·노동 규칙은 그대로다.
- 규제 비용. 국가마다 다른 규칙을 맞추는 비용은 원칙 선언만으로 줄지 않는다. 비르쿠넨이 말한 상호운용성이 실제로 표준 작업으로 이어지는지가 관건이다.
- 지식재산. 루트닉의 공정이용 발언은 미국 소송 지형과 맞물려 있다. G20가 학습 데이터 규칙을 통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인프라. 황의 데이터센터 확대 요구와 미국 지방의 입지 반대가 동시에 존재한다. 국제 원칙이 국내 전력·용수·토지 갈등을 해소하지는 않는다.
관찰자들이 지적하는 지점도 같다. 중국 서명은 외교적 점수이고, 유럽 집행은 별개 트랙이며, ‘novel’의 정의가 비어 있으면 각국은 원하는 대로 읽는다.
앞으로 볼 지점
12월 마이애미 G20 정상회의에서 이 원칙이 정상 선언문에 어떤 문장으로 남는지가 첫 시험이다. 장관 합의가 정상 문서로 격상되면 인용 빈도는 높아지지만, 법적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각국이 AI 전담 기구를 신설할지, 기존 부처·위원회에 기능을 얹을지가 갈린다. 미국은 후자를 국제 기준으로 제시했다. 유럽은 이미 AI 사무국과 회원국 당국이 AI법을 집행 중이다. 일본·한국·인도 등 중간 그룹이 어느 쪽 문장을 자국 입법에 인용하는지가 실제 영향력이다.
미·유럽 간 실무 쟁점은 상호운용성이다. 사전 규제와 사후 소송이 “실제로는 비슷하다”는 비르쿠넨의 말은, 기업이 두 체제를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보제공 요청이 조사로 넘어가는 속도가 유럽 쪽 바로미터가 된다.
중국은 서명 여부를 공식 문서로 확인할지가 남았다. 확인하지 않으면 미국 발표만 남는 합의가 된다. 확인하더라도 자국 심사·등록 제도를 후퇴시킬 이유는 적다.
캐롤라이나 원칙은 AI를 ‘새 산업’이 아니라 ‘기존 법 위의 신흥기술’로 다루자는 미국식 정의를 국제 회의에 올려놓은 사건이다. 합의는 성사됐다. 구속력과 집행은 각국 국내 제도에 그대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