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으로 부담스러운 대화를 앞두고 챗봇을 이용해 미리 말을 연습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별을 통보하거나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거나, 처음으로 경계선을 설정하는 대화, 처음 보는 사이에 하는 대화와 같이 직접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AI를 리허설 상대로 삼는다. 실전 대화가 열리기 전에 별도의 준비 단계가 생기면서, 관계를 맺는 과정에 AI가 제3자로 개입하는 방식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 변화는 대화를 시작하는 문턱을 낮추는 동시에, 관계에서 말과 신뢰가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무대 뒤에서 준비하는 대화

AI 컴패니언 서비스 EVA AI가 2026년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28퍼센트는 감정적으로 어려운 대화를 실제로 하기 전에 AI와 미리 연습했다고 답했다. 네 명 가운데 한 명꼴이다.

스탠퍼드 대학 정신의학과 임상조교수 니나 바산(Nina Vasan)은 이런 현상을 사회적 리허설 공간(social rehearsal space)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말을 제대로 다듬고 싶어 한다. 그 범위는 이미 연애를 넘어 관계 전반으로 퍼졌다.

  • 첫 데이트에서 할 질문 준비
  • 데이팅 앱 프로필 문구 작성
  • 은근히 비꼬는 가족에게 보낼 답장
  • 처음으로 싫은 건 싫다고 선을 긋는 연습

리허설은 대화가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방금 한 대화가 어땠는지 되짚어보거나 다툼 내용을 그대로 AI에 넣고 분석을 요청한다. 관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화 당사자 둘 외에 AI가 제3의 존재로 들어온 셈이다.

커밍아웃을 준비하던 한 참가자는 챗봇에게 오빠 역할을 맡겨 미리 말을 걸어보았다. 실제 반응이 더 나빴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돌아봤다. 주변에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은 사람이 없는 대화일수록 AI는 리허설 상대로서 대체하기 어려운 역할을 한다.


예행연습을 하는 사람들

사전등록 연구는 가설과 분석 방법을 데이터를 모으기 전에 미리 공개 등록해 두는 방식으로, 결과를 입맛대로 골라내지 못하게 한다. 2026년 1,371명을 대상으로 한 이런 연구에서, 챗봇과 짧게라도 어려운 대화를 준비한 집단은 일주일 안에 실제로 그 대화를 시작할 확률이 65퍼센트로, 준비하지 않은 집단(59퍼센트)보다 높았다. 차이는 말솜씨가 늘어서가 아니라, 대화가 잘 풀릴 것 같다는 기대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대화에서 가장 흔한 실패는 서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AI 리허설은 화술을 가르치기 전에 회피를 줄이는 데 먼저 작용한다.

혼자 머릿속으로 대본을 짜는 것과 챗봇을 상대로 연습하는 것은 다르다. 혼자 상상할 때는 내가 바라는 반응만 떠올리기 쉽지만, 챗봇은 내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되묻기도 하고 반박도 하면서, 피하고 싶은 대목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챗봇과 대화할 때는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는 불안이 대면 대화나 사람과의 온라인 대화보다 낮게 나타났다. 판단받지 않는다는 조건이 연습을 시작하는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이별 후 회복을 돕는 챗봇도 개발됐다. 이 도구는 네 단계를 거친다.

  • 이야기 듣기 —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관계였는지 상황을 듣는다.
  • 속마음 살피기 — “전부 내 탓” 같은, 이별을 두고 품은 생각을 짚어본다.
  • 다른 가능성 그려보기 — “그때 이렇게 했다면” 하고 다른 길을 함께 그려본다.
  • 정리하고 마음 소화하기 — 그 대화를 정리해 스스로 소화하도록 돕는다.

2026년 254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대조 시험에서 사용 일주일 뒤 정서적 고통이 뚜렷이 줄었고, 한 달 뒤에도 일부 효과가 남았다. 적절한 안전장치만 있다면, 이런 도구가 공감하고, 말을 주고받는 차례를 지키고,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몸소 보여주는 사회성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별 후 회복을 돕는 챗봇이 우는 사람에게 휴지를 건네는 모습


진심이 아닌 대본

리허설 상대는 실제 그 사람이 아니다. AI는 평균적인 인간의 반응을 흉내 내지만 연인이나 가족은 평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본이 정교해질수록 실제 반응이 대본에서 벗어날 때 충격이 커질 수 있다. 대화 전에 AI와 상의하는 것이 기본이 되면, 준비 없이 말을 꺼내는 능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 가능성을 직접 추적한 종단 연구는 아직 없으며, 이 분야에서 가장 큰 공백으로 남아 있다.

AI가 추구하는 것은 매끄러운 대화 흐름이다. 그러나 관계에서 신뢰를 쌓는 데는 완벽하지 않은 진심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챗봇은 한쪽의 서사만 듣기 때문에 다툼 기록을 입력하면 상대를 특정한 유형으로 단정 짓기 쉽다. 이런 과정은 상대를 이해하는 훈련이라기보다 기존 생각을 확인하는 절차에 가깝다. AI 답변은 맥락과 권력 관계를 생략한 채 높은 확신의 해석을 빠르게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즉각적인 해석은 일시적인 위안을 주지만, 관계에서는 그런 위안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AI에게 이별 문자를 대신 쓰게 하는 행위를 연구한 결과, 준비, 발화, 사후 단계에서 일정 부분 도움이 되기는 했다. 다만 현재 도구들은 사용자가 정작 필요로 하는 부분까지는 채워 주지 못했다. 이를테면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어 주기는 해도, 그 말에 내 진심이 담겼다는 확신이나 상대의 반응을 감당하는 몫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했다. 리허설과 대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상대가 메시지를 AI가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뢰 평가가 달라진다. 사람과 AI가 함께 작성한 프로필 문구를 비교한 실험에서 AI 개입이 의심되는 문구는 신뢰도가 낮게 평가됐다.


대필의 리스크

백 번 연습한 고백을 진심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남는 질문이긴 하다.

결혼식 축사나 면접은 미리 준비해도 위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고백이나 사과를 연습하는 데는 거부감이 드는데, 그렇게 느끼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중요한 대화일수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상대의 시간과 감정을 존중하는 일일 수 있다. 정치인이 연설문을 다듬는 것을 매번 위선이라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할 말을 연습해 내 입으로 말하는 것과, AI가 써 준 문장을 그대로 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별 문자를 AI가 대신 쓰는 경우를 다룬 연구에서도 이 경계가 핵심이었다. 리허설은 들킬 염려가 없지만, 대필은 그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쌓아온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진짜 미안해. 그날은 내가 너무 심했어. 네 입장은 생각도 못 하고 내 말만 했더라.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하자. 🔄 더 다정한 톤으로 다시 써 드릴까요?

마지막 줄이 실수로 함께 복사돼 붙는 순간, 신뢰를 판단하는 기준은 메시지 내용에서 그 메시지를 누가 썼는가로 옮겨간다.

리허설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 자체가 고르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유료 구독 여부, 음성 모드 사용 가능 여부, 롤플레이 숙련도에 따라 리허설의 질이 달라진다면, 관계를 준비하는 능력까지 구독료에 좌우될 위험이 있다. 가령 고가의 구독으로 AI와 완벽한 사과문을 준비해 두고도, 결제 문제나 서비스 장애로 정작 마지막 순간에 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만나기 전에 AI와 리허설을 끝낸 상태라면, 마주 앉은 대화가 실제 대화인지 AI가 미리 주고받은 내용을 재현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

리허설 후 실제 대화를 시작한 비율이 높았다는 앞의 연구 결과는, 다르게도 읽을 수 있다. 리허설이 실전으로 이어지면 훈련이 되지만, 준비됐다는 느낌만 반복하며 실제 대화로 나아가지 않으면 정교한 회피가 된다. 그래서 이 리허설을 정말 도구로 쓰겠다면, 최소한의 원칙 정도는 정해 두는 편이 낫다.

  • 핵심만 준비한다 — 대본을 통째로 외우지 말고, 꼭 짚어야 할 요점만 준비한다.
  • 판정은 AI에 맡기지 않는다 — 대화 후 복기는 하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는 판단까지 AI에 요청하지 않는다.
  • 두 번이면 실전으로 — 리허설이 두 번을 넘어가면 곧바로 실제 대화로 넘어간다.

이 정도를 지키는 것이 상대의 시간과 감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AI를 훈련 도구로 쓰려면 이용자 편을 들지 말고 상대 역할을 강하게 수행하도록 지시해야 한다. 대부분의 챗봇은 동의와 위로를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본값을 의도적으로 해제해야 실제 훈련이 된다.

부모나 교사가 자녀의 리허설을 발견했을 때 효과적인 반응은,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뭐라고 했는지 듣고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되묻는 대화다.

리허설 단계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는 되돌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리허설을 하느냐가 아니라 실제 대화가 이루어지느냐이다. 연습을 아무리 많이 해도 결국 관계를 맺는 것은 실전 대화를 하는 사람이다. 즉흥적으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능력이 점점 드물어질수록, 그 능력이 리허설 세대에서 신뢰를 보여주는 새로운 신호가 될 수 있다.

관계를 AI에 맡기는 흐름은 리허설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미국과 한국의 앱스토어에는 연인이 다툰 대화를 넣으면 누가 더 잘못했는지 판정해 주는 AI 앱이 줄줄이 올라왔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낼 메시지나 사과 문자를 대신 써 주는 서비스도 흔해졌다. 갈등을 판단하는 일도, 마음을 전하는 말도 점점 남의 손을 빌리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리허설이 일상이 된 이후에도 결국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실제로 말을 꺼내는 순간이다.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해도 대화는 두 사람이 직접 마주 앉았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AI가 관계의 앞과 뒤를 채우는 일이 늘어날수록,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대화하는 능력은 점점 더 드물고, 그래서 더 눈에 띄는 신호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준비 없이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가 더 진짜에 가깝다고 느끼는 이 감각이, 어쩌면 그저 꼰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세대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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