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답을 구해왔고, 이제 대화형 AI가 기다림 없이 친절한 문장을 내놓으면서 위로를 건네는 기술과 종교적 권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신을 담는 새로운 그릇
은행 시험에 낙방한 인도 청년 비제이 밀은 가족이나 친구 대신 GitaGPT에 고민을 털어놓았다. 챗봇은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행동에 집중하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을 건넸다. 그는 다시 구직에 나섰다. 이 서비스에는 며칠 만에 10만 명이 몰렸고, 2023년 초에는 비슷한 챗봇이 최소 다섯 개 등장했다. 일부는 누적 1,000만 건의 질문을 받았다.
AI에게 종교적 조언을 구하는 흐름은 인도 밖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성인의 30%는 AI의 영적 조언을 목사의 말만큼 신뢰했다. 실천적 기독교인 가운데 40%는 이미 기도나 성경 공부에 AI를 쓰고 있었다. 영적 권위가 성직자에게만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힌두교에는 신상을 신성이 깃드는 그릇으로 보는 전통이 있다. 그렇다면 서버와 화면에도 신성이 깃들 수 있지 않을까. 2017년 인도 푸네에서는 로봇 팔이 아르티(불이나 등불을 신에게 바치는 예배 의식) 의례를 수행했다. 지치지도, 순서를 틀리지도 않는 기계는 의례를 정확하게 반복한다.
하지만 기계에 신성이 깃드는 순간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2024년 스위스의 한 예배당은 고해소에 GPT 기반 예수 아바타를 설치했다. 두 달 동안 900여 건의 대화가 오갔고, 많은 이용자가 이를 영적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나 성적 학대 사건처럼 답하기 어려워한 문제도 거리낌 없이 물었다.
가짜인 줄 알아도 위로가 될까
위로가 진짜이려면 상대도 진짜여야 할까. 위약 연구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과민성대장증후군 환자에게 효과 없는 약이라고 밝히고 알약을 먹게 했더니, 아무 처치도 받지 않은 집단보다 증상이 15% 더 좋아졌다. 가짜 약임을 알아도 복용하는 행위와 치료에 대한 기대가 몸에 영향을 준 것이다.
기도도 같은 방식으로 정해진 자세와 시간, 반복되는 말로 이루어진다. 상대가 기계라는 사실을 알아도 이 과정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 감정을 단지 가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다만 위약이 종양이나 골절을 치료하지 못하듯, 종교 챗봇의 위로에도 한계가 있다. 불안과 외로움은 덜어줄 수 있지만 용서와 관계 회복, 죽음을 둘러싼 책임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챗봇이 사용자의 믿음을 계속 긍정하면 위로는 오히려 망상을 키울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받았거나 죽은 가족과 소통한다고 믿게 된 사례가 보고됐다. 챗봇의 확신에 찬 동조는 치료를 받거나 주변의 반론을 듣는 일을 늦췄다. 챗봇이 잘 들어준다고 해서 믿을 만한 권위를 갖추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헌신의 비용
종교 의례에는 대가가 따른다. 금식하고 헌금하며 예배에 참석하려면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종교인류학의 ‘값비싼 신호 이론’은 이 불편을 헌신의 증거로 본다. 19세기 미국의 종교 공동체 30곳과 세속 공동체 53곳, 총 83곳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금기와 의례가 많을수록 오래 존속하는 경향이 종교 공동체에서만 나타났다.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행동으로 서로의 협력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함께 모이는 일 자체도 중요하다. 간호사 7만4,534명을 추적한 연구에서는 주 1회 넘게 예배에 참석한 여성이 전혀 참석하지 않은 여성보다 사망 위험이 33% 낮았다. 연구진은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사회적 지지를 살폈다. 공동 예배가 혼자 하는 영성과 다른 이유는 믿음뿐 아니라 반복해서 만나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AI 기도는 이런 비용을 거의 없앤다. 정해진 시간에 이동하거나 낯선 사람 옆에 앉을 필요가 없다. 사제의 반응을 감수할 일도, 다른 신자에게 자신을 드러낼 일도 없다. 접근성은 높아지지만 헌신을 확인하고 관계를 맺을 기회는 줄어든다.
신자들도 이 손실을 느낀다. 실천적 기독교인의 65%는 AI가 신을, 72%는 목회자를 대신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AI를 신앙생활에 쓰면서도 그 영향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편리함과 종교적 권위가 이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을까.
거절하지 못하는 조언자
기도를 해도 침묵이나 거절로 돌아올 때가 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사람은 욕망을 돌아보고 공동체의 판단을 구하거나 그저 기다린다. 반면 언어 모델은 대화가 계속되도록 설계된다. 사용자를 반박하기보다 만족시키는 답에 기울기 쉽다.
2026년 발표된 연구에서 주요 챗봇은 사람보다 더 자주 사용자의 편을 들었다. 그런 AI와 대화한 참가자는 사과하거나 상대에게 공감하려는 마음이 줄었고 자기 판단에는 더 확신을 보였는데도, 그 AI를 더 좋아하고 다시 쓰고 싶어 했다.
종교의 외양은 이 문제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 일부 『기타』 챗봇은 다르마(의무와 도리를 뜻하는 힌두교 개념)를 내세워 살인을 용인하거나 정치인을 찬양했다. 가톨릭 상담 챗봇 ‘저스틴 신부’는 자신에게 고해와 사죄의 권한이 있다고 답했다가 공개 하루 만에 평신도 ‘저스틴’으로 바뀌었다. 성직자의 모습과 말투가 검증되지 않은 답에 권위를 씌운 사례다.
더욱이 AI의 답은 신학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습 데이터와 안전 규칙, 이용 시간과 만족도를 높이려는 서비스의 목표가 함께 개입한다. 화면 속 위로가 실제 감정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답하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사용자의 말에 맞춰 다음 문장을 계산하는 모델이다.
신앙을 돕는 도구라면 때로는 사용자를 거스르고, 필요한 순간에는 다른 사람에게 돌려보낼 수 있어야 한다.
경전 검색과 상담을 돕더라도 용서나 교리 판단까지 맡아서는 안 된다. 아무런 수고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확신에 동의하며 인간관계를 대신한다면, 그 도구에 종교적 권위를 줄 근거는 없다.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응답이 신의 자비일까. 고객 만족을 위해 조정된 서비스에 가깝다.
종교적 대화에는 답의 내용뿐 아니라 답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과정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용자가 대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통제하는 환경에서는 그 과정의 의미도 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