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기술의 성능은 빠르게 갱신되지만 법과 교육, 조직의 판단은 같은 속도로 바뀌지 않는다. 변화가 빨라질수록 속도 자체보다 사회가 판단을 수정할 시간이 얼마나 남는지가 중요하다.
빙하와 유리, 반응 속도가 다른 이유
윤리학자 윌리엄 매캐스킬과 연구자 핀 무어하우스는 1925년부터 2025년까지의 역사를 10년으로 압축했다. 사건의 순서는 그대로인데,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석 달 만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같은 역사도 속도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숙고하고 적응할 시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빙하와 유리 같은 물질도 관찰 시간에 따라 다른 상태로 나타난다. ‘데보라 수’에 따르면 빙하는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변형되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에는 고체처럼 깨진다. 데보라 수는 물질의 완화 시간을 관찰, 공정 시간으로 나눈 값으로, 값이 클수록 고체처럼, 작을수록 유체처럼 거동한다. 물질의 완화 시간과 관찰 시간의 비율이 거동을 결정한다. 제도 역시 법을 만들고 기준을 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EU AI법은 고위험 시스템 의무 시행 일정을 늦췄다.
| 대상 | 시행 시점 |
|---|---|
| Annex III 관련 의무 | 2027년 12월 |
| Annex I 관련 의무 | 2028년 8월 |
이 격차는 기술과 제도의 속도 차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 속도 자체가 이제 빨라지고 있다. 세계 연구인력은 해마다 5%도 늘지 않지만, AI의 연구 관련 인지노동 투입은 인간 연구자의 증가율보다 500배 이상 빠르게 늘어난다는 추계가 있다. 연구를 자동화한 AI가 더 나은 AI를 만들면 속도는 다시 빨라진다. 그 결과 충격의 강도는 외부 개입 없이도 커지지 않는가.
우리는 변화의 속도를 제대로 느끼는가
사람은 일정한 속도보다 속도의 변화를 잘 느끼는데, 반고리관은 각가속도가 끝나고 일정한 회전이 이어지면 10~20초 만에 신호가 약해져 기울어진 비행을 수평으로 착각할 수 있다.
몸의 감각은 틀렸어도 계기보다 확실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1954년 일리노이대 연구에서 계기비행 훈련을 받지 않은 조종사 20명은 시야가 가려지자 평균 178초 만에 통제력을 잃었지만, 간단한 훈련을 받은 뒤에는 60차례 중 59차례 탈출에 성공했다.
빠른 변화 속의 사회라고 다를까. 전례가 생기기 전에 다음 판단을 내려야 하니 낙관론과 파국론이 함께 커진다. 그 와중에 측정 도구조차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AI 평가기관 METR가 측정하는 ‘과제 완료 시간지평’은 AI 에이전트가 일정한 성공 확률로 마칠 수 있는 과제를 인간 기준 소요 시간으로 나타낸 지표로, 2019년 이후 약 7개월마다 두 배로 늘었고, 2023년 이후에는 배증 주기가 130.8일로 짧아졌다. 2026년 5월에는 기존 과제로 16시간이 넘는 능력을 제대로 재기 어렵다는 공지도 나왔다. 측정 지표가 실제 능력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
후계자 없는 자동화
지식은 개인의 머릿속에 완성된 채 저장되지 않는다. 약 1만 2천 년 전 태즈메이니아 집단이 고립된 뒤 뼈도구 같은 기술이 사라졌고, 창던지개도 사라졌다는 관측이 있다.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있지만, 인구와 교류가 줄면 모방과 혁신의 기회도 줄어든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누적문화는 집단의 크기와 연결망에 기대고 있다.
직장에서도 숙련은 문서만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초급자는 선임자의 판단을 지켜보고 실수를 고치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준과 예외를 배운다. 초급 업무를 AI에 맡기면 당장의 생산성은 오르지만, 다음 숙련자가 진입할 자리는 줄어들지 않는가.
실제로 이미 고용시장에 변화가 보인다.
- 2026년 3월 초급 정규직 공고 중 AI 역량을 요구한 비율은 4.2%로 1년 전의 거의 두 배였다.
- AI 노출이 큰 직군에서는 22~25세 고용이 연 3.8% 줄고 35~40세 고용은 늘었다.
초급 단계가 사라지면 다음 세대는 이미 축적된 지식에 다가갈 진입점을 잃는다.
되돌릴 수 있는 영역과 없는 영역
피드백 제어에서는 관측과 판단 사이의 지연을 무시하고 반응을 강하게 만들면 시스템이 흔들리거나 폭주한다. 빠른 대응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지연 자체가 제어 성능의 한계를 정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와 앤서니 피셔는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미루는 데도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기다리는 동안 정보가 늘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기회가 남는다. 취소할 수 있는 선택지에 ‘준옵션가치’가 붙는 이유다. 의도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은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미래의 선택지를 남겨두는 방법이다.
늦출 곳과 늦추지 않아도 될 곳
그렇다고 모든 일을 늦출 필요는 없다. 되돌리기 쉬운 실험과 제품 개선은 빠르게 해도 된다. 속도를 제한할 곳은 권력의 영구적 집중, 살상 판단의 자율화, 가치의 고착, 되돌릴 수 없는 감시 인프라처럼 실패를 취소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다음 세대가 숙련을 익힐 초급 경로를 없애는 일도 여기에 속한다.
결국 가속의 시대에는 지능이나 생산성보다 결정을 되돌릴 여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 100년의 변화가 10년에 몰려와도 수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방향을 선택할 여지를 가진다. 반대로 모든 결정이 돌이킬 수 없다면 그 이후의 선택지는 과거의 선택으로 정해진다. 비가역적인 영역에서 일부러 늦게 가며 치르는 손실은 낭비가 아니라 선택권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한 번의 결정을 당시의 성과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른 선택을 검토할 사람과 경로가 남아 있는지에 따라 이후 결과가 달라진다.
